살인


한여름, 그 친구의 집 앞을 서성이면서 나는 때아닌 열병에 괴로워했다. 그 친구가 나를 스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 나는 밤새 옮겨 적은 수많은 마음들이 멀어져 감을 느꼈다. 나는 그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까치발을 들고서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로 그녀의 앞에서 나는 초라했다. 어쩌다 그녀가 내게 미소를 비춰주는 때에는 헐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마음 한구석의 서늘함은 떠날 기별조차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결국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 일이 갑작스레 그렇게 되었다. 땅과 하늘이 바뀐 것처럼 좋아했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것 이상으로 불안했던 것 같다. 으레 어리고 약한 영혼들이 그런 것처럼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거대한 바다속으로 뛰어들었고 허우적댔다. 하지만 나를 가라앉게 만든 것은 해일 같은 파도가 아니었다. 바다라고 덤벼든 곳이 알고 보니 호수였다는 사실. 이 거대한 괴리감이 나를 상실케 하였다.


사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멋대로 착각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정말로 그녀의 미소가 햇살보다 더 밝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노여운 목소리는 천둥처럼 위엄이 있었고 쓸쓸한 눈빛이라도 내비치는 날에는 온 세상이 주저앉았다. 이 정도면 정신병이라고 생각할 법 하건만 그때의 나는 이것을 낭만으로 이름 붙였다.


얼마되지않아 예정된 일처럼 연애는 끝이 났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녀라는 관념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허황되기 그지 없었음에도 나의 렌즈에 비추어진 그녀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 어떤 사실보다도 그녀가 고작 그런 놈과 사귄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공주님이 한 순간에 마구간 소녀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를 영원히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로 결정했다. 그 날,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죽였다.



발견 


트와이스의 <cheer up> 뮤직비디오는 미소녀들의 파티에 불청객처럼 끼어든 나를 비추며 시작한다. 그녀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귀찮아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신비의 렌즈를 들어 그녀들을 비추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의 입맛대로 코스프레한 그녀들은 내게 말한다.





“난 너무 예쁘고 모두가 나를 좋아해. 하지만 아무하고나 만나진 않을거야. 내가 무관심하게 굴어도 힘을 내 봐. 날 우아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너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 렌즈에 의하면, 사실 그녀들이 나에게 무관심하게 굴었던 것은 그래야 내가 그녀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해온다면 도리가 없다. 열심히 스트리밍하고 음악 방송에 문자 투표를 할 수 밖에.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저렇게 예쁜 애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같은 의미로 뮤직비디오의 말미에 내가 렌즈를 벗어버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마법의 렌즈를 벗었지만 그녀들은 코스프레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녀들은 여전히 세일러문이고 히로코이며 페이이다. 그리고 내가 파티의 주변인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그렇다. 그녀들은 애초에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코스프레 놀이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녀들은 나를 내심 좋아하고 있던 소녀가 아니라, 연기를 즐겁게 하고 있을 뿐인 아까 나에게 무관심하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cheer up> 뮤직비디오는 렌즈가 벗겨지는, 즉 판타지가 일시에 사라지는 이 장면을 굳이 삽입함으로써 그 허무함을 보여준다. 나의 현실은 시궁창인데 여전히 밝고 청량한 그녀들의 모습은 은근한 조롱으로 느껴질 법 하다. 그런데 조롱이 향하는 대상은 어디인가? 현시창인 나인가? 아니면 기만적인 미소녀들? 이 뮤직비디오는 노골적인 은유를 통해 우리의 손가락을 집중시킨다.





덕후 안경을 쓰면 트와이스의 시큰둥하고 짜증 섞인 시선은 사실은 ‘나에게 더 다가오라’는 신호일 뿐이다. “여자의 No는 Yes”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뮤직비디오는 판타지를 위태롭고 극단적인 지점까지 몰아붙인다. 2분 55초 지점에서 겁에 질려 움츠리는 나연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그리고 그 장면에 붙는 가사 “지금처럼 조금만 더 다가와”는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미소녀의 힘, 맛있는 파히타, 아이돌로지)


그렇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마법 렌즈가 문제다. 이 렌즈는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의 눈과 귀를 앗아갔다. 렌즈로 비추어진 세계에서 나는 언젠가의 소년이다. 나는 열심히 소녀를 사랑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을 다 줄 것이다. 그녀가 외면한다고 해도. 외면이 사실은 나의 모험을 위한 준엄한 시험대인 줄 누가 알겠는가. 나는 매일같이 파티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면 내심 나를 바라고 있을 그녀들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열렬히 모험을 하다 보면 렌즈 밖 소녀들이 실제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균열


오스카 와일드가 예의 그 시니컬한 목소리로 “각 남성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 라고 말했을 때 나는 궁금했다. 왜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 내 사랑의 완결일 수 있을까. 그 물음의 답을 찾을 새도 없이 세상엔 참혹한 소식들이 넘쳐났다.




A.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며 살인을 예고했던 한 남성이 강남역 화장실에서 여성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살인했다.

B. 일본 아이돌 가수 도미타 마유는 전날 오후 7시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오후 5시쯤 도쿄도 고가네이시의 공연장으로 걸어가던 중 팬으로부터 흉기로 20차례 찔렸다.


우리는 결단코 이것을 낭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히로인을 너무 사랑하고 갈구해서 죽인다는 서사의 구조는 우리가 때때로 매혹적으로 여기는 낭만과 닮아 있다. 이 서사에서 히로인은 주인공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숭배받는 여신이기도, 무서운 팜므파탈이기도 하다. 언제나 주인공은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며 헌신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 서사는 균열의 지점에 봉착한다.


A. 주인공이 그녀를 얻으려는 시도가 좌절된다.

B. 성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사실은 타락한 창녀였다.


남성적인 낭만주의의 결말은 모든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다. 그녀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캐서린이든 그리스 항아리든, ‘그녀가 완벽해야 한다는 긴장’은 그녀가 반드시 죽어서 남자 주인공의 위대한 연인이라는 지위를 도전 받지 않는 상태로 남겨두어야 함을 의미한다.(Germaine Greer, The Female Eunuch, 1970)


과연 내가 그녀를 평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과 사랑하는 대상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내 입맛에 맞게 바람을 잔뜩 채워 넣어 허공으로 띄웠을 뿐. 나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잔뜩 그리워만 했다. 그러다 그것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어린 아이가 실망을 배신으로 착각하듯,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내던지고 만 것이다. 결국 나의 그리움은 나를 위한 한편의 연극에 불과했다. 나는 이 연극이 완벽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을 보잘 것 없는 남자에게 떠나보내는 길보다는 차라리 없애버리는 길을 택했다. 나 역시 사랑하는 것을 죽였다.


이 무도함에 남성, 여성의 생물적 구별이 중요한가. 그건 아니다. 잘못은 낭만에 있다. 정확히는 낭만이라는 렌즈에서 보여지는 남성과 여성이 중요하다. 낭만의 서사에서 남성은 어떻게든 여성의 시선을 받고 있어야만 하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여성은 항상 남성의 시선속에서 지배당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진정으로 필요한 질문은 왜 항상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만 이 질문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여인을 숭배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궁정식 사랑'이 '로맨스'로 이름 붙어있기 때문이다.


헌신 아래 나는 용서받을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것도. 그녀를 숭배해 온 마음의 깊이를 생각하면 아주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쯤 쓰다 보니 한 가지 불안이 내 온 마음을 흔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 사랑해서 죽이면 어쩌지?



진술서


나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다. 온갖 싸구려들과 가짜들로 뒤덮여 있는 세계가 그녀의 영혼에 생채기를 일으킬 때면 나는 무너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가가 먼지를 털어주고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만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마음에 삐뚤게 모나 있는 혹마저 보듬어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시간보다 가만히 안아 주는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손에 땀이 많던 그녀를 위해 자주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그 연애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 같은 중요한 것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속에서 실제 그녀는 존재할 틈이 별로 없었다. 나는 부재하는 그녀의 존재를 위해 나의 헌신을 제물로 열심히 제사를 지냈다. 그녀가 아닌 나의 여신을 위해서.


나와 헤어진 후 그녀는 요란한 남자와 만났다. 그 남자는 별로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인 것 같았고 나는 그를 증오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지만 그때의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굳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그녀는 온전히 빛이 났다. 나의 여신은 아니었지만 멋진 여자였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여신과의 사랑을 위해 그녀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절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The Metastases of Enjoyment, Slavoj Žižek, 1994) 나의 연극은 나의 시선에 지배당하는 그녀에 대한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헌신을 통해 나의 살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가.





이제서야 나의 오래된 좌절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그녀를 혐오해서 살인한 게 아니다. 사랑해서도 아니다. 숭배했기 때문에 죽였다. 마법 렌즈속에서 분명히 페이는 나를 보며 손짓했다. 누군가 알려주었어야 했다. 그 렌즈는 더이상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라고. 렌즈 밖 세상에서 그녀는 내게 손짓을 한 게 아니라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든 것이라고. 멋대로 착각해서 제멋대로 그녀를 페이로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이 엉망진창인 물건을 세상에 잔뜩 풀어 두었으면서 내게 말한다. 렌즈가 문제가 아니라 너가 문제야. 이 정신병자야!


그렇게 말하면 억울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다소 어이가 없다.



해방


나는 이 글이 구호나 선언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누군가를 죽인 그 이유로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고백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적어냈을 뿐이다. 그런데 나를 망쳐버린 그 마법 렌즈가 새로 포장되어 시중에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품의 하단에는 작게 <이 제품은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꽃받침을 한 미소녀가 수줍게 '샤샤샤' 라고 외치는데 그 문구는 보일 턱이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끔찍스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우리의 특이하고 짐승 같은 동거 기간에, 결코 남과 다를 바가 없는 롤리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가족과의 삶이 내가 이 고아에게 줄 수 있었던 최선의 삶, 이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삶보다는 더 나았으리라는 것을 점차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Vladimir Nabokov, Lolita)”


언젠가 샤샤샤를 외치던 미소녀도 렌즈는 사기였고 내가 사실은 당신 시선 속에 있지 않다고, 나같이 멋진 여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백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아이들은 손수 입으로 분 풍선이 바람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울고 말겠지. 하지만 괜찮다. 다른 한쪽 마법 렌즈 판매대에서 삐에로 아저씨가 더 팽팽하고 예쁜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이 삐에로에게로 옮겨가고 난 뒤. 바닥에 뒤집힌 풍선은 비로소 자기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풍선을 가여워 하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통으로 가는 삶일지라도 공중 위에 목이 매달려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 나을 테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조금 더 굵은 펜으로 팔리지 않은 마법 렌즈에 <취급주의> 라는 문구를 새길 것이다.



'inzin1327'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티는 끝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1) 2016.03.07
헤픈거 나쁜거야?  (0) 2015.12.22
왜 아이유는 철이 들어야 하나요?  (2) 2015.11.08

타인에서 두려움까지,  사람실격 <인간실격>



-타인의 심연으로 추락


 농담을 하고 있었다. 내 농담이 나와 저 사람의 대화를 서먹한 인사말에서 친근한 미소로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주 절친한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불편한 사이는 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게 농담을  꺼내는 게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거짓 미소가 얼굴에 남겨놓은 주름도 자연스럽게 접혀 농담이 그럴듯하다. 여느 날처럼 다른 누군가와 의무적인 농담을 나눌 때 문득 요조가 떠올랐다.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실격>에서 그린 주인공 요조 역시 농담을 즐기곤 했었다. 나처럼 그 농담이 그에게도 진짜 농담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요조의 농담은 나의 농담과 닮아있었다. 농담은 일종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고 인간과 이어질 수 있는 가느다란 선이었다. 농담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들과 그나마 ‘잘’ 지내게 해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어떤 괴로움을 안고 사는지,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나 역시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을까. 아니면 더 복잡한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웃고 있는 저 사람도 슬플 수 있겠지. 겉보기에 삐에로는 항상 웃고 있어서 마냥 행복해보이지만 웃는다고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안다.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웃고 있는 삐에로 가면 속에 숨겨진 슬픈 맨 얼굴을 무심코 외면하기에 너무 나도 익숙하다. 익숙하지만 익숙한 그들의 맨 얼굴을 마주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웃는 가면과 그 맨 얼굴의 간극은 아득할 정도로 멀다. 마주할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도 당신을 진심으로 대할 것입니다.”라는 빛바랜 말이 와닿지는 않는다. 간단히 진심이라는 말로 그 간극을 건너기엔 절벽이 너무 가파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농담이다. 농담이라는 가느다란 선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천천히 다른 사람들의 맨얼굴에, 진심에 다가가는 것이다. 

 요조에게는 이것마저 쉽지 않았나보다. 그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나, 악어, 용보다 더 무서운 동물적 본성을 보았다. 평소에는 그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예를 들어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자다가 갑자기 배에 앉은 파리를 꼬리로 탁 쳐서 죽이듯 한 인간의 본성을. 인간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 그것은 어쩌면 농담이라는 가느다란 연결고리로는 뛰어넘기 어려운 절벽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모한 기대를 해본다.



- 기대에서 두려움으로


 “고등학생 3년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해. 그러면 남은 인생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까.” 꿈 많던 고등학생 시절, 교실에 앉아서 각 수업시간마다 들어오는 모든 선생님의 말씀은 녹음기를 반복 재생하는 것처럼 한결같았다. 행복한 인생이라는 기대는 자유분방한 나를 교실 한 구석 의자에 앉혔다. 3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엉덩이와 의자는 떨어질 줄 몰랐고, 무던히 노력한 내 고등학생 3년은 쓰디 쓴 실패를 맛보았다. 실패는 쓰고 써서 무언가를 다시 도전하려해도 실패의 쓴 맛이 떠올라 쉽게 전념할 수 없었다. 물론 내 앞에 놓인 길은 무수하고 그 험난한 길 뒤에는 달콤한 오아시스도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달콤한 오아시스보다 앞에 놓인 험난한 길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 날의 오아시스에 대한 기대는 노력을 낳았지만 불가피하게 이어진 실패는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없는 두려움 속에 빠뜨렸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항상 진실일까. 진실여부를 떠나서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말은 희망을 담고 있어 말 자체로 아름답다. 간절히 바랐던 일들이 모두 이뤄졌던 것은 아닌 걸 보면,  씁쓸하게도 그 말이 아름다운 만큼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아름다울 것만 같은 꽃길의 종착지가 추한 실패 뿐이라면 그 여정보다 슬프고 절망스러운 여정은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고 좋은 결과였다 생각했지만 알아주지 않는 직장상사, 동료, 후배들 혹은 친구들.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을 정도라며 자부했지만 증명해주지 않는 학점. 충분히 표현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大天命).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내 뜻은 이뤄진다던가! 오랜 격언과는 다르게 보상되지 않는 노력들은 허공에 흩어져 허망하고 심지어 두렵다. 기대는 필연적으로 노력이라는 꽃을 피웠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고사(枯死)하였다.



-타인이라는 기대의 결말


혹시라도, 어쩌면 진심을 다한다면 나의 맨 얼굴과 타인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역설한 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을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온 힘을 다한다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한다. 분명히 어떤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어려운 난관일수록 극복 했을 때의 기쁨은 다른 어떤 난관을 극복 했을 때의 기쁨보다 클 것이다. 비 온 뒤 땅은 굳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한 친구들이 다른 누구보다 더 내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이정도면 한번 부딪혀 볼만하지않을까.

하지만 가장 높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가 가장 낭떠러지로 추락 하듯, 멀리 쓸려간 썰물이 가까이 밀려오는 밀물이 돼 돌아오듯. 큰 기대일수록 실패했을 때의 두려움은 단 한번의 새로운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열 번 찍어서 안넘어가는 나무는 없다지만 한 번 찍어서 도끼가 부러진다면 나무는 어떻게 쓰러뜨릴 것인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단 한 번의 실패가 더 이상의 시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면 과연 성공을 낳을 수 있을까.

사람을 무서워하기까지했던 요조도 어쩌면 사람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큰 기대여서 요조에게 닥칠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요조는 사람이 속을 알 수 없고 잔인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 속에서 사는게 당연한 이 세상은 그에게 지옥이었다. 두렵기만한 지옥에서 요조는 농담과 익살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이었고, 차악(次惡)이었다. 그런 그의 삶에도 먹구름 가운데 한줄기 빛이 나타났다. 사람이 두려워 자신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는 요조에게 요시코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었다. 그와 다르게 그녀는 순수하게 사람을 믿었던 것이다. 그 점이 요조를 구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온 요조의 슬픔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뿐 아니라 요조에게 실로 상상을 초월할만큼 큰 것이었다. 불 켜진 방에는 짐승 두마리가 있었다. 하나는 요시코였지만, 다른 하나는 요조가 아니었다. 요시코는 겁탈 당한 것이었다. 의심할 줄 모르는 요시코는 의심이 없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라면 요시코를 겁탈한 괴한에게 있었다. 요조는 이후 요시코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했다. 요시코 역시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요조의 농담에도 안절부절못하고 벌벌떨기만 했다. 그저 요조에겐 요시코가 더렵혀졌다기보다 요시코의 믿음이 더렵혀졌다는 것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씨가 되었다. 믿음이 죄가 되는 걸까. 아, 맑고 순수한 믿음은 죄의 원천이 되는 건가. 요조는 세상과의 최후의 연결고리인 농담과 익살마저 잃고 폐인이 되었다. 삶을 비웃듯이. 더 이상은 세상 따위는 필요 없듯이.

요조는 실패하고 말았고 요조의 타락을 목격한 나로서 두렵기만하다. 언젠가 내 노력은 커다란 행복을 낳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실패가 두렵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조심스럽게 다가가 익숙하게 농담을 건네고 웃음을 사고 속으론 쓴 웃음을 짓는 것 뿐이다. 조금만 더 나를 알아 달라 다가가면 알아줄까. 내가 보여준 진심이 그들에겐 거짓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도 그들이 불편하진 않을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나와 너의 관계는 이렇게 시야에서 멀어진다. 큰 기대도 두려움으로 끝날 희망고문이라 자조(自嘲)하면서 농담만 할 뿐이다. 








@우도




14.06.18









'yeonii_'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2016.05.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