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한여름, 그 친구의 집 앞을 서성이면서 나는 때아닌 열병에 괴로워했다. 그 친구가 나를 스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 나는 밤새 옮겨 적은 수많은 마음들이 멀어져 감을 느꼈다. 나는 그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까치발을 들고서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로 그녀의 앞에서 나는 초라했다. 어쩌다 그녀가 내게 미소를 비춰주는 때에는 헐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마음 한구석의 서늘함은 떠날 기별조차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결국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 일이 갑작스레 그렇게 되었다. 땅과 하늘이 바뀐 것처럼 좋아했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것 이상으로 불안했던 것 같다. 으레 어리고 약한 영혼들이 그런 것처럼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거대한 바다속으로 뛰어들었고 허우적댔다. 하지만 나를 가라앉게 만든 것은 해일 같은 파도가 아니었다. 바다라고 덤벼든 곳이 알고 보니 호수였다는 사실. 이 거대한 괴리감이 나를 상실케 하였다.


사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멋대로 착각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정말로 그녀의 미소가 햇살보다 더 밝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노여운 목소리는 천둥처럼 위엄이 있었고 쓸쓸한 눈빛이라도 내비치는 날에는 온 세상이 주저앉았다. 이 정도면 정신병이라고 생각할 법 하건만 그때의 나는 이것을 낭만으로 이름 붙였다.


얼마되지않아 예정된 일처럼 연애는 끝이 났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녀라는 관념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허황되기 그지 없었음에도 나의 렌즈에 비추어진 그녀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 어떤 사실보다도 그녀가 고작 그런 놈과 사귄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공주님이 한 순간에 마구간 소녀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를 영원히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로 결정했다. 그 날,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죽였다.



발견 


트와이스의 <cheer up> 뮤직비디오는 미소녀들의 파티에 불청객처럼 끼어든 나를 비추며 시작한다. 그녀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귀찮아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신비의 렌즈를 들어 그녀들을 비추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의 입맛대로 코스프레한 그녀들은 내게 말한다.





난 너무 예쁘고 모두가 나를 좋아해. 하지만 아무하고나 만나진 않을거야. 내가 무관심하게 굴어도 힘을 내 봐. 날 우아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너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 렌즈에 의하면, 사실 그녀들이 나에게 무관심하게 굴었던 것은 그래야 내가 그녀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해온다면 도리가 없다. 열심히 스트리밍하고 음악 방송에 문자 투표를 할 수 밖에.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저렇게 예쁜 애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같은 의미로 뮤직비디오의 말미에 내가 렌즈를 벗어버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마법의 렌즈를 벗었지만 그녀들은 코스프레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녀들은 여전히 세일러문이고 히로코이며 페이이다. 그리고 내가 파티의 주변인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그렇다. 그녀들은 애초에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코스프레 놀이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녀들은 나를 내심 좋아하고 있던 소녀가 아니라, 연기를 즐겁게 하고 있을 뿐인 아까 나에게 무관심하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cheer up> 뮤직비디오는 렌즈가 벗겨지는, 즉 판타지가 일시에 사라지는 이 장면을 굳이 삽입함으로써 그 허무함을 보여준다. 나의 현실은 시궁창인데 여전히 밝고 청량한 그녀들의 모습은 은근한 조롱으로 느껴질 법 하다. 그런데 조롱이 향하는 대상은 어디인가? 현시창인 나인가? 아니면 기만적인 미소녀들? 이 뮤직비디오는 노골적인 은유를 통해 우리의 손가락을 집중시킨다.





덕후 안경을 쓰면 트와이스의 시큰둥하고 짜증 섞인 시선은 사실은 ‘나에게 더 다가오라’는 신호일 뿐이다. “여자의 No Yes”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뮤직비디오는 판타지를 위태롭고 극단적인 지점까지 몰아붙인다. 2 55초 지점에서 겁에 질려 움츠리는 나연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그리고 그 장면에 붙는 가사 “지금처럼 조금만 더 다가와”는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미소녀의 힘, 맛있는 파히타, 아이돌로지)


그렇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마법 렌즈가 문제다. 이 렌즈는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의 눈과 귀를 앗아갔다. 렌즈로 비추어진 세계에서 나는 언젠가의 소년이다. 나는 열심히 소녀를 사랑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을 다 줄 것이다. 그녀가 외면한다고 해도. 외면이 사실은 나의 모험을 위한 준엄한 시험대인 줄 누가 알겠는가. 나는 매일같이 파티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면 내심 나를 바라고 있을 그녀들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열렬히 모험을 하다 보면 렌즈 밖 소녀들이 실제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균열


오스카 와일드가 예의 그 시니컬한 목소리로 각 남성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궁금했다. 왜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 내 사랑의 완결일 수 있을까. 그 물음의 답을 찾을 새도 없이 세상엔 참혹한 소식들이 넘쳐났다.




A.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며 살인을 예고했던 한 남성이 강남역 화장실에서 여성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살인했다.

B. 일본 아이돌 가수 도미타 마유는 전날 오후 7시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오후 5시쯤 도쿄도 고가네이시의 공연장으로 걸어가던 중 팬으로부터 흉기로 20차례 찔렸다.


우리는 결단코 이것을 낭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히로인을 너무 사랑하고 갈구해서 죽인다는 서사의 구조는 우리가 때때로 매혹적으로 여기는 낭만과 닮아 있다. 이 서사에서 히로인은 주인공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숭배받는 여신이기도, 무서운 팜므파탈이기도 하다. 언제나 주인공은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며 헌신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 서사는 균열의 지점에 봉착한다.


A. 주인공이 그녀를 얻으려는 시도가 좌절된다.

B. 성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사실은 타락한 창녀였다.


남성적인 낭만주의의 결말은 모든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다. 그녀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캐서린이든 그리스 항아리든, ‘그녀가 완벽해야 한다는 긴장은 그녀가 반드시 죽어서 남자 주인공의 위대한 연인이라는 지위를 도전 받지 않는 상태로 남겨두어야 함을 의미한다.(Germaine Greer, The Female Eunuch, 1970)


과연 내가 그녀를 평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과 사랑하는 대상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내 입맛에 맞게 바람을 잔뜩 채워 넣어 허공으로 띄웠을 뿐. 나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잔뜩 그리워만 했다. 그러다 그것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어린 아이가 실망을 배신으로 착각하듯,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내던지고 만 것이다. 결국 나의 그리움은 나를 위한 한편의 연극에 불과했다. 나는 이 연극이 완벽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을 보잘 것 없는 남자에게 떠나보내는 길보다는 차라리 없애버리는 길을 택했다. 나 역시 사랑하는 것을 죽였다.


이 무도함에 남성, 여성의 생물적 구별이 중요한가. 그건 아니다. 잘못은 낭만에 있다. 정확히는 낭만이라는 렌즈에서 보여지는 남성과 여성이 중요하다. 낭만의 서사에서 남성은 어떻게든 여성의 시선을 받고 있어야만 하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여성은 항상 남성의 시선속에서 지배당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진정으로 필요한 질문은 왜 항상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만 이 질문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여인을 숭배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궁정식 사랑''로맨스'로 이름 붙어있기 때문이다.


헌신 아래 나는 용서받을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것도. 그녀를 숭배해 온 마음의 깊이를 생각하면 아주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쯤 쓰다 보니 한 가지 불안이 내 온 마음을 흔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 사랑해서 죽이면 어쩌지?



진술서


나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다. 온갖 싸구려들과 가짜들로 뒤덮여 있는 세계가 그녀의 영혼에 생채기를 일으킬 때면 나는 무너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가가 먼지를 털어주고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만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마음에 삐뚤게 모나 있는 혹마저 보듬어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시간보다 가만히 안아 주는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손에 땀이 많던 그녀를 위해 자주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그 연애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 같은 중요한 것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속에서 실제 그녀는 존재할 틈이 별로 없었다. 나는 부재하는 그녀의 존재를 위해 나의 헌신을 제물로 열심히 제사를 지냈다. 그녀가 아닌 나의 여신을 위해서.


나와 헤어진 후 그녀는 요란한 남자와 만났다. 그 남자는 별로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인 것 같았고 나는 그를 증오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지만 그때의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굳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그녀는 온전히 빛이 났다. 나의 여신은 아니었지만 멋진 여자였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여신과의 사랑을 위해 그녀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절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The Metastases of Enjoyment, Slavoj Žižek, 1994) 나의 연극은 나의 시선에 지배당하는 그녀에 대한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헌신을 통해 나의 살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가.





이제서야 나의 오래된 좌절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그녀를 혐오해서 살인한 게 아니다. 사랑해서도 아니다. 숭배했기 때문에 죽였다. 마법 렌즈속에서 분명히 페이는 나를 보며 손짓했다. 누군가 알려주었어야 했다. 그 렌즈는 더이상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라고. 렌즈 밖 세상에서 그녀는 내게 손짓을 한 게 아니라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든 것이라고. 멋대로 착각해서 제멋대로 그녀를 페이로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이 엉망진창인 물건을 세상에 잔뜩 풀어 두었으면서 내게 말한다. 렌즈가 문제가 아니라 너가 문제야. 이 정신병자야!


그렇게 말하면 억울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다소 어이가 없다.



해방


나는 이 글이 구호나 선언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누군가를 죽인 그 이유로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고백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적어냈을 뿐이다. 그런데 나를 망쳐버린 그 마법 렌즈가 새로 포장되어 시중에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품의 하단에는 작게 <이 제품은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꽃받침을 한 미소녀가 수줍게 '샤샤샤' 라고 외치는데 그 문구는 보일 턱이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끔찍스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우리의 특이하고 짐승 같은 동거 기간에, 결코 남과 다를 바가 없는 롤리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가족과의 삶이 내가 이 고아에게 줄 수 있었던 최선의 삶, 이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삶보다는 더 나았으리라는 것을 점차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Vladimir Nabokov, Lolita)”


언젠가 샤샤샤를 외치던 미소녀도 렌즈는 사기였고 내가 사실은 당신 시선 속에 있지 않다고, 나같이 멋진 여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백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아이들은 손수 입으로 분 풍선이 바람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울고 말겠지. 하지만 괜찮다. 다른 한쪽 마법 렌즈 판매대에서 삐에로 아저씨가 더 팽팽하고 예쁜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이 삐에로에게로 옮겨가고 난 뒤. 바닥에 뒤집힌 풍선은 비로소 자기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풍선을 가여워 하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통으로 가는 삶일지라도 공중 위에 목이 매달려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 나을 테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조금 더 굵은 펜으로 팔리지 않은 마법 렌즈에 <취급주의> 라는 문구를 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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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했다

 

<빌리 엘리어트>가 거친 현실을 거슬러 투쟁하는 소년의 희망을 그려냈다면, 같은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 <디 아워스>는 영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의 성공에 이어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소설 <디 아워스>를 토대로 이 영화를 연출한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1923, 1951, 2001년을 배경으로 한 세 여자의 하루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도발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 믿어요. 그대가 준 행복 말로 다 할 수 없고 당신이야말로 내게 정말 소중했으나 나로 인해 무너지는 그대 모습 더 이상 볼 수 없어, 나 이렇게 떠나요. 꼭 행복하세요.”

 

버지니아 울프는 실제로 정신질환을 비관하여 자살하였다. 그녀가 자살 직전에 쓴 편지를 인용하여 막을 연 이 영화는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임신중인 주부 로라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한다.”를 읽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2001년의 뉴욕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클라리사는 애인인 샐리에게 꽃을 사야겠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1923년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도입부에서 나타나듯 이 영화는 <댈러웨이 부인>을 매개로 시공을 달리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가 교차시키고 있다.

로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놀랍도록 확신에 찬 여인이 파티를 열려고 하는 날, 그녀는 행복해보이지만 그건 남들이 만든 모습이었고 진실은 달랐어.”라고 간단히 요약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 기법으로 써 낸 소설로써 삶에 대한 권태로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셉티머스라는 사람의 자살을 통해 의식이 변화하게 되고 삶의 의지를 얻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소설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언젠가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겠지?

 

영화 속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구상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댈러웨이 부인이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1951, 로라가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이윽고 그녀의 친구인 키티가 방문한다. 자궁에 문제가 생긴 키티는 애를 갖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를 위로하던 로라는 키티와 키스하게 되고 무언가 꿈틀대며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전쟁 이후 집안에서의 삶을 강요받은 여성들의 억압과 궤를 같이 한다.

결국 버지니아 울프의 예언과 같이 그녀는 이 작은 사건으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곧 그녀는 약을 챙겨 아들을 이웃집에 맡긴 후 호텔 방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자살하지 못하고 둘째 아이를 낳은 후 가족에게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장면들 사이에 버지니아 울프가 조카들이 연 새의 장례식에서 새를 골똘히 바라보는 씬은 <댈러웨이 부인>의 서사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했을 때 의미심장하다.

한편, 영화 속의 버지니아 울프는 전지적으로 소설을 쓰는 주체임은 분명하나 영화가 보여주는 그녀의 삶 역시도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신병으로 교외 지역에서 유배당하다시피 요양하게 된 그녀는 끊임없이 런던이 상징하는 주체로써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갈망하지만 결국 그녀가 유일하게 온전히 그녀로써 존재하는 공간은 소설 속의 세계뿐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그녀에게 일종의 도피처일 뿐, 그녀를 해방시키진 못했다. 그녀가 친언니인 바네사에게 격정적으로 키스하며 언젠가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짓눌린 감정들이 폭발한다. 비로소 이 감정들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녀는 소설 속에서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안에서 그 누군가는 셉티머스라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셉티머스의 자살은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 소설 속에서 셉티머스는 사실 댈러웨이 부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전쟁 후유증을 앓던 전역군인이었으며 권위적인 의사가 정신병을 이유로 그를 요양소에 가두려 하자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그의 처지가 버지니아 울프의 처지와 상당 부분 대비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셉티머스의 운명과 같이 결국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소설 속에서 셉티머스의 자살을 받아들이는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 변화로 짐작할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를 모르지만 영혼의 자유를 억압당한다는 점에서 그의 처지에 공감한다. 그래서 자살의 충동에 휘둘리게 되지만 결국 그녀는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세세한 변화를 영화라는 시각적인 매체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 속의 댈러웨이 부인들이 의식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리처드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여는 것은 침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옛 애인으로 에이즈 투병중인 작가이다. 클라리사는 그의 병수발을 돕고 있다. 영화 속 그 날, 클라리사는 그의 문학상 수상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하지만 그는 파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한다. 계속 파티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클라리스에게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여는 것은 침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순간 로라가 가족을 버리고 떠날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다. 과연 그 침묵이 무엇이기에 모두가 외면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침묵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함의를 남긴다. 그것은 침묵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어서 리처드와 클라리사는 대화한다.

 

이 파티 누굴 위한 파티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난 당신을 만족시키려고 살아왔다는 거야.”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냐? 사람들 모두 서로를 위해 살아가잖아 당신은 금방 죽지 않을 거야.“

당신을 위해 살던가 죽던가 하라는 거야? 그럼 당신 인생은 뭐야? 당신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도피처로 삼고 당신 인생은 뒷전이겠지.”

 

클라리사는 그의 집을 나오며 가쁜 숨을 내쉰다. 그녀가 정곡을 찔린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침묵이 가져다 줄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로 리처드의 간호 역할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그녀의 영혼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리처드가 말한 것처럼 그 역할은 고독을 맞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 방어적 정념에 가깝다. 그러나 그 답을 그녀가 스스로 미처 다 내리기도 전에 리처드는 그녀의 눈앞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영화는 장면을 전환하여 로라가 결심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과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 속에서 꼭 누군가가 죽어야 하냐는 남편의 물음에 남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죠.”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교차시킨다. 그러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시인도, 환상도 죽어 사라지죠.”라고 말하는데 정교하게 배열된 이 장면들은 곧 리처드가 누군가에겐 파티가 끝난 후의 침묵과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종의 환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는 리처드와 자신의 자살이 살아나갈 사람들에게 도피처에 머물지 말고 자기 자신의 고독과 직면하라는 외침임을 공공연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고민한다. 침묵을 맞이한 댈러웨이 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는 그 답을 로라와 클라리사가 하나의 공간에서 대면하게끔 만듦으로써 대답한다.




 

파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리처드가 자살한 그 날, 로라는 클라리사의 집을 방문한다. 로라가 버리고 떠난 아들이 바로 리처드였던 것이다. 리처드를 중심으로 연결된 두 여자의 만남으로 극의 긴장감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로라는 1951년의 그 날을 클라리사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선택은 숙명이었다고 말한다.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 자신은 파티를 끝마쳐야 했다는 것이다.

 

죽음 같은 현실보단 삶을 택한 것이에요

 

대화가 끝나고 클라리사는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파트너인 샐리에게 키스한다. 영화에서는 버지니아와 그의 친언니 바네사, 로라와 키티, 클라리사와 샐리 이렇게 세 번의 키스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앞의 두 키스는 사회가 가로막은 그녀들의 욕망이 폭발하는 것이 격정적으로 그려진 반면 클라리사와 샐리의 키스에서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옅은 미소가 배어나온다. 마저 다루어지지 않은 댈러웨이 부인의 운명이 이 장면에서 극적으로 암시된다.

앞서 파티를 준비하는 클라리사를 방문한 리처드의 전 애인 루이스는 그녀에게 말했다.

 

리차드를 떠난 그 날 나는 기차로 유럽을 여행했어. 그런 자유로움을 수 년 만에 느꼈지.“

 

영화는 침묵이라는 단어로 은유한 그것의 정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주인공들이 양성애자나 레즈비언 등의 개인적 억압을 가지도록 설정하여 관객이 미루어 짐작할 만한 흔적만 보여줄 뿐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주인공들이 가진 고독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듯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말한 것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가진 고독에 대해 직면하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결국 파티를 마치고 침묵을 맞이한 댈러웨이 부인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찬미하게 될까? <댈러웨이 부인>을 탈고한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영화는 자그마한 위트로 그 힌트를 제공한다. 영화 속에선 전반에 걸쳐 예정치 않은 시간에 방문객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일찍 도착해서 무례한가요?” 이것이 첫 번째 힌트다. 그리고 여기 클라리사의 대사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새벽녘 잠에서 깼는데 뭔가 될 거 같았어. 그런 느낌 아니? 이런 생각이 들었지. 이제부터 계속 행복할 거야. 이건 시작이고 더 큰 행복이 올거야. 다 헛된 기대였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순간 행복했고 바로 그 순간이 전부였던 거야.”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일상의 어떤 날이었다. 생각했던 그 때에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우리가 그것을 무례하게 여기거나 그 순간을 거절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순간이 영원한 그 시간(the hours)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일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일상의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일상의 행복 또한 찾아오고야 말기 때문이다.

영화가 버지니아 울프의 수많은 하루 중 그녀가 자살하는 날이 아니라 <댈러웨이 부인>을 구상하는 하루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바로 그녀가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워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본인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기때문이다. 그녀의 자살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비극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녀의 자살을 은유로 하여 영화 속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가 삶과 직면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예고한다. 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영화는 놀랍도록 정교한 서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한다.

영화가 묻는다.

 

파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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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광국이를 알아?

 

아침 토크쇼의 단골 질문, ‘부부간의 스킨십에 대한 흔한 대답은 스킨십은 남이랑 하는 거지. 아내는 가족이잖아”. 이 우스갯소리에 반응하는 남자들의 공감대 섞인 분위기만으로 결혼에 대한 어린 시절 나의 환상은 깨져버렸다.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되는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성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가족이 무엇이기에 이런 끔찍한 비극들을 양산해낸단 말인가. 이 질문에 영화 <바람난 가족><가족의 탄생>은 우리가 가진 하나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무너뜨림으로써 우리에게 오히려 되묻는다. 들을 준비는 되고 이 자리에 앉았니?

두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기타노 다케시가 가족에 대해 표현한 말처럼 누가 보는 사람만 없다면, 어디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들이다. <가족의 탄생>에서 미라의 남동생인 형철은 어린 시절 집에 나가 연락도 없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20살이나 많은 애인 무신과 나타나 미라의 집에서 살림을 꾸린다. “내가 책임질게.”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무신과 전남편의 아이를 제멋대로 집에 받아들이고는 훌훌 떠나버린다.



한편 <바람난 가족>의 영작은 누가 봐도 번듯한 직업과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게 평온하진 않다. 그에게는 아내 몰래 깊은 내연의 관계를 가진 여자가 있다. 영화 속에서 그가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은 드물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는 빈번히 애인을 찾아 잠자리를 갖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내와의 섹스에는 더 이상 충실하지 않다. 그는 그저 밀린 일을 해치우듯 정사를 마치며 아내의 욕구를 외면한다. 영화 속 남자들은 가장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흔히 우리가 가장에게서 요구하는 책임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외롭다. 영화에서 영작의 애인은 말한다.

 

땀 뻘뻘 흘리며 섹스 해봐야 외롭긴 마찬가지죠?”<바람난 가족>

 

그들의 외로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역설적이지만 사랑의 관계속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영작의 아버지 창근은 6.25 한국 전쟁 당시 어머니와 누이들을 두고 이북에서 피난 내려왔다. 그는 평생 잃어버린 가족들을 그리워하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간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와 정신이 혼미한 순간에도 그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과거의 가족에 극도로 집착한다. 하지만 그는 정작 지금의 가족들에게 어떤 애착도 느끼지 못하며 가족들 역시 그를 노망난 늙은이로 여길 뿐이다. 가족에 매달려 살아온 인간이 외로움 속에서 죽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영화는 한 장면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상습적인 절도를 일삼는 한 부인을 변호하는 영작에게 판사가 가정은 어떤가요?”라고 묻자 그는 남편은 회계사인데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막상 부인은 그 질문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 대조 속에서 경제생활을 하는 남편이 주축이 된 이상적인 가족 관계와 그런 관계에 종속된 일원으로 기능하는 가족들은 교차한다. 영화는 기형적인 부계 관계의 집착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도리어 현대 사회의 남성일 수 있음을 우편배달부를 통해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우편배달부는 경제력이 떨어져 가족 관계에서 역할을 잃은 가장이다. 결국 가족에게서 소외받은 그는 여전히 관계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처남인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를 아냐고 묻는다. 당연하게도 챔피언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주니어 웰터급 5위라는 어정쩡한 위치만큼 애매한 관계인 처남을 계속해서 되뇐다. 교통사고의 가해자인 영작의 거짓말에 분노한 그가 영작과 호정의 아들 수인을 죽이며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라고 외치는 장면은 부계 중심의 가족관에서 소외받는 남자의 아이러니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장면을 전환해보자. 당연하게도 가족 놀이에 지치기는 호정 역시 마찬가지다.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결혼을 하면 더 많이 섹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호정의 기대는 결혼 생활속에서 좌절되고 아내라는 역할에 매몰되어 여자도 아닌 중성적인 취급을 받는 사실이 실망스럽기만 하다. 이 때 호정은 그녀를 몰래 훔쳐보던 옆집 고등학생 지운의 시선에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그녀는 얼마동안 연애나 하자는 지운의 당돌한 요청에 응한다. 섹스를 하기 위해서 갖은 수를 쓰는 지운을 귀엽게 여기면서도 호정은 그를 애타게 만들며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호정은 어떤 관계에서도 벗어난 지운과의 일탈에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정작 지운과의 섹스는 영화의 말미가 되어서야 일어난다. 그것이 수인이 죽고 난 이후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수인은 전통적인 가족관에서 벗어난 아이이다. 입양아인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인은 왜 자기한테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냐고 묻는다. 그러자 호정은 대답한다.

 

그게 진짜니까. 너한테만 비밀로 하는 건 좀 불공평하잖아.”

근데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나는 왜 엄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바람난 가족>

 

이 대목에서 영화는 무엇이 정말 가족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영화에서 수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종속된 관계를 떠난 하나의 주체로써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가 남인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 내내 혈연과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영화 속 남자들을 대조시킨다. 이 대조를 통해 영화는 애정을 기반으로 한 가족과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족이라는 두 세계관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결국 이 두 상반된 가족관을 지탱해주던 수인이 죽음으로써 사실상 관계의 가족상은 파멸을 맞이한다.

 


누난 연애만 하는 게 좋아

 

<가족의 탄생>의 선경은 이 딜레마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경에게 가족이란 짐 덩어리다. 사랑을 위해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엄마의 모습에 선경은 치가 떨린다. 그래서 그녀는 어서 빨리 한국에서 벗어나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려고 힘쓰지만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서 갈등한다.



영화 속에서 선경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거절하면서도 집착하고 있다. 그녀가 배다른 동생 경석에게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것과 똑같은 시계를 빼앗으려는 장면은 실상 그녀야말로 전통적인 가족관에 대해 얼마나 애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경석과 엄마의 애인 운식을 보며 엄마에 대해 배신감을 반복적으로 느끼고 이들의 관계에 파국이 올 것이라며 저주한다. 선경은 계속 답답해한다. 엄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선경과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준호의 대화는 그녀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왜 그래 나한테?”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 ...넌 왜 그래 나한테?”<가족의 탄생>

 

두 사람은 서로 상대가 변했다고 공허하게 외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랑이 식었을 뿐이다. 감독은 애정을 전제로 한 관계에서 애정이 사라진 빈틈을 비추어줌으로써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덧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어떤 관계도 애정 없이는 계속될 수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한다. 선경은 엄마에게 묻는다. 아저씨들이 엄마한테 돈을 원해왔냐고. 하지만 엄마는 그들이 자기에게 원한 것은 사랑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런 그녀를 선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석의 체육대회에서 경석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발견한 선경은 엄마를 부정하고자 운식의 집으로 향한다. 선경은 운식의 가족들 앞에서 엄마를 사랑 하냐고 물으며 운식이 비겁해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운식은 사랑한다. 진심으로.”라며 선경을 절망으로 빠뜨린다.

결국 선경의 엄마는 죽는다. 드디어 선경은 엄마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 선경은 엄마가 갑작스럽게 집에 들어와 놓고 갔던 가방 속에 가득한 선경의 사진과 기록들을 통해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오는 패티김의 노래 이별은 선경에게 엄마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패티김, 이별>

 

그들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오직 사랑이었다. 그리하여 선경은 관계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엄마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되고 배다른 동생 경석을 거두어 가족처럼 키운다. 그리고 어느덧 큰 경석에게 선경은 누나는 연애만 하는 게 좋아.”라고 말하며 엄마와 화해하고 이해하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족관의 갈등은 세대를 넘어 경석에게도 남은 모양이다. 경석은 선경에게 말한다.

 

누나가 이상한거지. 누나 엄마랑 똑같잖아.” 

네가 엄마에 대해서 뭘 알아?” 

알아, 구질구질해.”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으셨던거야.”<가족의 탄생>

 

선경은 엄마와의 갈등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냈지만 그 과정을 겪지 못한 경석에게 엄마는 이전의 선경이 그랬던 것처럼 구질구질한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과연 경석은 엄마와 화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애정을 전제로 해서 가족을 바라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감독은 이 두 가지 질문을 답하기 위해 경석을 엄마와 똑같은 헤픈 여자 채현과 만나게 한다.



헤어지면 밥도 안먹니?

 

경석은 선경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한다. 경석은 모두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여자 친구 채현이 불만스럽다. 그는 거듭해서 자신과의 관계에 집중해달라고 채현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채현은 넘쳐나는 사랑을 베푸는데 여념이 없다. 결국 잃어버린 아이를 찾느라 선경과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현에게 경석은 이별을 통보한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어. 나 네 옆에 있으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너 꼭 나 아니어도 되잖아.”<가족의 탄생>

 

경석은 독점적으로 자신만이 채현의 유일한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채현이 경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녀가 관계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결혼을 하고 가족이라는 관계로 재구성된다면 경석은 덜 외로울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애정이다. 결국 경석도 채현을 떠나지 못한다. 그가 채현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능청스럽게 돌아온 경석에게 채현은 냉담하다. 돈을 안 갚는 채현 선배의 전화에 불같이 화를 낸 경석에게 채현이 이제 상관 없잖아 라고 말하자 경석은 또다시 열을 낸다. 채현은 그런 경석에게 나 헤프잖아 라며 선을 긋는다.

그래도 경석은 채현을 사랑하기에 그녀를 계속 따라나선다. 채현을 따라 길을 건너던 경석이 사고를 당할 위기를 겪자 채현은 경석을 꽉 안아주고 두 사람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경석은 채현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한다. 그는 엄마의 흔적이 담긴 시계를 개조해 그 시계가 보물을 가르키고 있으며 채현이 바로 그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채현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 경석이 오로지 애정을 중심으로 채현과 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경석에게 확인하듯 채현은 묻는다. 헤픈거 나쁜거야?

흔히 헤프다는 말은 관계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다. 헤픔은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특권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관계는 경석과 채현의 첫 만남처럼 헤프게 애정을 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 아닌가. 영화는 무엇이 먼저인지를 묻는다.

 

엄마! 보내줘. 우리 헤어졌어.” 

근데 뭐? 야 헤어지면 뭐 밥도 안먹니?”<가족의 탄생>

 

채현은 사실 극 초반에 미라의 집으로 형철이 데려온 무신과 전남편 사이의 아이였다. 채현의 고향 집 앞에서 경석과 마주친 미라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채현의 말에 헤어지면 밥도 안 먹냐고 응수한다. 그리고 함께 들어선 미라의 집에는 무신이 가족으로 기다리고 있다. 미라와 무신, 채현은 과거의 그 날에서 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가족들과 경석이 함께 텔레비전에 나오는 경석의 누나 선경의 노래를 듣게 함으로써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아무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가족으로 모이는 가장 큰 구심점에는 애정이 존재했다. 영화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관계 속에 애정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 있는 곳에 관계가 깃든다는 원초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므로 관계가 끝이 나버렸다고 해도 애정이 있으면 언제든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 그렇기에 헤어져도 밥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바람난 가족>에서 관계에 매몰된 가족은 호정의 표현대로 아웃되었다. 15년 동안이나 섹스를 하지 못하다가 바람이 나서야 비로소 오르가즘을 느꼈다는 영작의 어머니 병한은 한국을 떠나면서 호정에게 수인을 입양해올 때 미안했다고 이야기한다. 비로소 그녀는 가족이란 관계의 관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편 <가족의 탄생>에서 미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불쑥 찾아온 형철을 단호히 내쳐버린다. 형철은 비록 그녀의 가족이지만 껍데기만 가족인 남동생 형철과 아무런 연고는 없는 남이지만 애정을 통해 가족으로 거듭난 무신을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가족은 가족 역시 완전히 남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비로소 새롭게 탄생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족을 유지해주는 유일한 구심점은 오직 애정에 있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광국이를 찾으며 울부짖느니 조금은 헤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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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뜨거운 감자가 있다. 아이유의 곡 <Zeze>. 도발적인 소년, 은밀한 톤의 목소리, 묘하게 해석될만한 가사. 화자의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화자가 그린 대상을 통해 청자에게 관능적인(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야한 느낌)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대중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그 모티브가 된 대상이 청소년 권장도서 주인공인 학대 받는 5살 아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의구심이 든다. 이 노래가 정말 어린 아이에 대한 성적 욕망을 제재로 한 노래인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윤리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이 곡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이 곡을 폐지시켜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이(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으레 용서받는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그 어떤 것. 그 어떤 것을 만든 결핍 그 자체, 또는 결핍을 통해 잉태된 상징적인 인간. 사실 아이유가 다룬 소재는 그녀가 싸구려 성 도착증을 앓고 있어서 다룬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재생산된 진부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유에게는 세 번 입천장에서 혀 끝으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롤. . .’가 험버트를 몇 마디로 지옥에 빠뜨리듯, 알렉스가 자유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장황하게 선언하듯, 누나에게 얻어 맞은 제제가 개년이라고 외치는 그 순간 이 상징을 발견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상징의 속성이 외설적인가, 그렇지 않은 것을 떠나서 그것을 관능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고착된 성적 욕구를 의미한다 말할 수 있을까? 아이유의 <Zeze>가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성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성적으로 교제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 5살의 학대 받는 어린아이를 소재로 삼아 결핍을 표현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그것을 소재로 쓰는 것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면 시리아 내전으로 피난을 가다 숨진 어린이들의 시체 사진 역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어떤 작품을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소재 그 자체가 아니라 소재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고결할 때에만 허락되는 소재가 있을 수 있을까? 비참하다고 그것이 꼭 엄숙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상징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이 혐오든 섹시함이든 그것은 전적으로 청자의 몫이며 창작자는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것을 자신의 생각하는 최적의 소재와 방식을 통해 드러낼 뿐이라는 점이다. 아이유는 제제의 결핍을 소재화 했다. 그것이 미적으로 뛰어난 방식이었는가? 하는 점에는 수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윤리적으로 적절한가? 하는 물음은 이미 물음이 아니다.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창작자에게 ㄱ, , ㄷ을 빼고 언어를 쓰라고 통보하는 것과 같다.

 

<에곤 쉴레, 벌거벗고 있는 소녀>


이렇듯 예술이 도덕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출판사 동녘처럼 저급하게 작품의 가치를 깎아 내리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해석의 몫을 출판사가 짊어지려는 시도 역시 우스꽝스럽지만 가장 심한 것은 예술이 대중들의 도덕적인 목적에 복무할 때 그 의미를 가진다는 태도이다. 동녘의 논리대로라면 쉴레의 작품이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은 도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제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포르노그래피인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처형의 근거가 되는 형상을 위한 세 가지 습작>


 아마도 우리는 액자가 간접적으로 그림의 감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만약 액자가 걸기에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웅장하고 화려해서 소박한 수채화를 감상하는 데 집중하기가 어렵다면, 이 경우는 액자는 그림감상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액자가 그 수채화의 예술적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매튜 키어런, 예술과 그 가치, p.208)

 

 니체는 예술이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예술의 도덕적 성향에 대한 저항, 즉 예술이 도덕에 복종해야 한다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의미하는 바는 도덕은 악마에게나 줘버리라는 것이다.”라며 예술과 도덕이 분리되어야 함을 아주 거칠게 주장했다.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이 대중들의 도덕적 교화에 복무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일 때, 사회가 낳을 수많은 졸렬한 유산들과 함께 어쩌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역시도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운명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던 충분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은 대중들의 커다란 공분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글일 수도 있다. 사실 사람들은 <Zeze>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아이유라는 인간이 어떤 혐오스러운 생각을 했는지를 더 궁금해한다. 아이돌이라는 예술의 장르에서는 화자 역시 예술의 제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을 듣고 불쾌감을 느꼈다면 듣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사람들이 굳이 <살로 소돔의 120>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녀의 노래를 찾아 들으며 질문한다. “너는 어쩜 그렇게 교활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니?”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대중 예술이 가진 속성이라고. 대중 예술의 위치는 대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며. 나도 그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녀가 대중과 괴리된 채 대중적이지 않은 곡들만을 계속 발표한다면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의 방식에 대해서 찍어 누르려는 교조적인 시선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개인의 생각에 대해 제한하려는 시도이다. 하물며 예술의 영역에서는 다를까.

 

<티에르니 기어른, Home>


20013월 사치(Saatch) 갤러리의 <나는 사진기 I am a Camera> 전시회가 런던 경찰청의 외설 출판물 담당 부서에 의해 수색을 당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작품 때문이다. 사진작가 티에르니 기어른은 자신의 6살짜리 딸과 4살짜리 아들을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채 가면을 씌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 작품은 구도와 설정, 배경 모두에서 관능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사법 당국에 고소를 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방식이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불러일으키려는 감정이 어린 아이를 향한 성적인 욕망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며,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욕망이 인간에게 중요한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의 전제에는 생각은 그 자체로 처벌할 수 없다는 중요한 자유의 원칙이 있었다.

 

물론 아이유가 표현을 위해 사용한 제재인 제제는 적합한 표현의 수단이 아닐 수 있다. 제제라는 캐릭터가 가진 수많은 속성들 중 아이유가 선택한 단면은 너무 상업적이었으며 그것을 다루는 방식 역시 단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노래가 몇 십 년 뒤에 회자되거나 교과서에 실릴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그녀가 대중들 앞에서 기나긴 사과문을 쓰고 죄인처럼 지낼 것을 강요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세계에서 진부한 것들은 외면을 통해 사라져나갈 뿐이다. 그 밖의 방식으로 어떤 생각이 제한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통해 인류가 이루었던 수많은 진보를 한 순간에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는 것과 같다.  

 

<영화 롤리타, 스틸컷>


솔직히 말해 우리는 애들이 노브코프가 가르치는 과목에는 절대 등록해선 안 된다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애들이 사적인 대담에서 그와 얘기를 하거나 어두워진 뒤 교정에서 부딪히거나 할까봐 걱정이랍니다!(Andrew Field, Nobokov: his life in part, p.277)”

 

위의 내용은 <롤리타>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 학부모들이 보내온 항의 편지이다. <롤리타>가 출판사로부터 포르노 취급을 받으며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 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 결국 진부한 결론이다. 아이유가 나보코프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아이유의 사과 한 마디로 수많은 나보코프들은 스스로에게 검열의 칼을 씌우고 펜을 멈칫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유의 다음 앨범은 보다 지루하고,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들로 대중의 사랑을 구할 것이다. 그 세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리라. 그리고 대중들은 지루한 것을 못 견디며 그녀를 내칠 것이다. 마치 어른이 되어버린 듯. 밍기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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